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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공장을 짓는 가장 큰 걸림돌이 기술도, 자금도 아니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생소했습니다. 정작 발목을 잡는 건 전기를 어디서 만드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충당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용인 반도체 산단을 둘러싼 진짜 문제를 파고들면 들수록, 이건 단순한 에너지 정책 논쟁이 아니라 수도권 과밀과 민원, 국가 전력망의 물리적 한계가 얽힌 복합 난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탑 하나가 막아선 세계 최대 클러스터, 미래는 있을까 - 송전망
처음 이 문제를 들여다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의문은 원전을 더 짓든, 재생에너지를 늘리든, 전기를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왜 자꾸 '공급 불가'라는 결론이 나오는 걸까. 직접 숫자를 따라가면서 문제의 본질을 찾아보았습니다.
반도체 팹(Fab) 하나가 소비하는 전력은 최신 공정 기준으로 약 1.5GW입니다. 여기서 GW(기가와트)란 10억 와트에 해당하는 전력 단위로, 한국형 원전 한 기의 발전 용량인 1.4GW를 살짝 웃도는 규모입니다. 쉽게 말해 반도체 공장 하나를 돌리려면 원전 한 기로도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용인 클러스터에는 이 팹이 최종적으로 열 개 들어설 계획이니, 이론상 15GW 이상의 전력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런데 제가 진짜 중요한 것은 발전량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현재 수도권으로 연결된 광역 송전망(Grid Interconnection)의 사용 가능 용량이 고작 1% 수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기서 광역 송전망이란 지방의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수도권까지 끌어오는 고압 송전 인프라를 의미합니다. 수도권은 전력 계통 안정을 위해 이 용량 대부분을 비상 예비 자원으로 묶어둬야 하기 때문에, 평시에는 거의 쓰질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해 보입니다. 송전탑을 더 세우면 되는 것 아닐까. 제 경험상 이 지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멈칫합니다. 현재 수도권에 연결된 송전 용량은 44GW인데, 용인 클러스터에 필요한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려면 지금보다 4배에 가까운 추가 송전망이 필요합니다. 그 철탑이 지나가야 할 경로는 이미 빽빽하게 개발된 경기도 곳곳입니다.
실제로 경기 남부의 30km짜리 송전 노선 하나를 완공하는 데 22년이 걸린 사례가 있습니다(출처: 한국전력공사). 민원 한 건이 전체 공사를 막을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하남 동서울 변전소 업그레이드조차 인근 주민 반대에 막혀 수년째 지연되고 있는 현실을 떠올리면, '철탑을 더 세우면 된다'는 말이 얼마나 단순한 낙관론인지 실감하게 됩니다. 이 문제는 기술 문제가 아니라 이해관계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용을 정리해 보면 용인 반도체 산단의 진짜 장벽은 전력 생산보다도 수도권 광역 송전망의 물리적 한계와 사회적인 한계로 귀결됩니다.
약속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생각해 보자 - 전력공급·수소혼소
송전망 문제가 장기 과제라면, 당장 팹이 완공되는 시점에 전기를 어떻게 넣을 것이냐는 훨씬 급박한 문제입니다. 정부와 SK 하이닉스가 내놓은 단기 해법은 용인 산단 인근에 LNG(액화천연가스) 가스 발전기 여섯 기, 총 3GW 규모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느꼈을 때 '그래, 이건 현실적인 선택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곧 다음 문제가 따라붙었습니다.
온실가스 문제입니다. 삼성전자는 2050년 탄소 중립을 투자자들에게 공약했고, 정부도 국제사회에 탄소 감축을 약속한 상태입니다. 가스 발전소를 그냥 돌리면 온실가스가 쏟아집니다. 그래서 등장한 개념이 수소혼소(混燒) 발전입니다. 수소혼소란 LNG 발전소에서 천연가스 대신 수소를 일부 섞어 태워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론상 수소 비율을 높이면 탄소 배출을 대폭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론상 깔끔한 해법'에는 반드시 현실의 벽이 있습니다. 용인 산단 환경 영향 평가서에 따르면 2032년 가동 시 온실가스를 21.4% 줄이기 위해 연간 5,623 GWh의 수소 전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정부가 CHPS(청정수소발전시장입찰제도, 수소로 만든 고가 전기를 국가가 대량 구매하는 제도)를 통해 구매하겠다고 밝힌 물량은 연간 500 GWh에 불과합니다. 필요량의 10분의 1도 안 됩니다(출처: 산업통상자원부).
이 숫자를 처음 봤을 때는 제가 잘못 읽은 줄 알았습니다. 다시 확인해도 같았습니다. 정부가 환경 평가에서 약속한 온실가스 감축 수치를 채우려면 정부 구매 물량 전량을 용인 산단 한 곳에만 쏟아부어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게다가 국내 청정 수소 생산 설비는 용인 산단 1년 치 수요의 10%도 되지 않는 수준으로, 결국 수소를 해외에서 대량 수입해야 하는 구조가 됩니다. 이는 러-우 전쟁이나 호르무즈 해협 사태처럼 지정학 리스크가 터질 때마다 에너지 가격이 요동치던 제3국 수입 의존 문제를 그대로 안게 되는 것입니다.
그사이 SK 하이닉스는 말이 아닌 돈으로 자신의 판단을 드러냈습니다. 2025년 설비 투자(CAPEX) 규모를 전년 30조 원대에서 40조 원대 후반으로 끌어올렸고, 용인 1기 팹의 클린룸 가동 시점을 원래 계획보다 3개월 앞당겼습니다. 이처럼 공사 일정을 단축하는 건 반도체 업계에서 오히려 드문 일입니다. 주요 고객사와 장기공급계약(LTA, Long-Term Agreement)을 먼저 체결하고 예치금까지 받아둔 뒤 투자를 결정한 덕분에 가능한 행보입니다. 쉽게 말해 고객의 돈을 먼저 받아놓고 공장을 짓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 공장에 전기를 넣는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전력 문제는 원전을 더 지으면 해결되지 않느냐 의견도 있으나 핵심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도체 공장까지 전기를 운반하는 송전망이 없어서입니다. 전력을 안정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송전망은 발전 용량의 4배 이상이 필요합니다. 결국 철탑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면 땅속 케이블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데 실제로는 지중선로에도 전자파를 이유로 주민의 반대가 심해서 문제입니다. 서울의 강남처럼 이미 상업과 주거지역으로 완성된 도심에서는 공사 시점에 주민협의가 함께 이루어졌던 반면 지금 문제가 되는 구간은 신규로 부지를 확보해야 해 반발이 더 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수십조 원의 비용이 투입된 팹이 완공되고도 전력을 공급받지 못하면, 가동 자체가 지연되는 심각한 상황에 놓일 수 있습니다. 공장 옆에 자체 발전소를 짓는 것이 현실적이겠다 싶었습니다.
환경영향 평가를 통과하는 데 수소혼소 감축계획을 명분으로 썼기 때문에 이것이 무산되면 사실상 환경 평가 당시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현실적으로 LNG 발전소를 그냥 돌리거나 막대한 비용으로 해외 청정수소를 수입하거나 하는 두 가지 선택지만 남습니다.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국민의 전기요금이나 세금으로 비용을 메꿔야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리하면 용인 반도체 산단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 보면서 제가 느낀 건, 이건 "원전이냐 재생에너지냐"의 이념 싸움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수십 년간 개발이 포화 상태인 수도권에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집어넣겠다는 결정이 얼마나 도전적인지, 전력 인프라 숫자를 보면 피부로 느껴집니다.
SK 하이닉스가 40조 원 넘게 투자를 확대하며 속도전에 나선 건 수요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공장에 전기를 넣는 일은 기업 혼자 해결할 수 없습니다. 철탑 한 줄을 두고 수백만 명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용인 팹들이 순차적으로 가동에 들어갈 때마다 전력 공급 계획이 어떻게 맞춰지는지, 꼼꼼히 지켜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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